쇼코 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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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쇼코 천황은 1412년부터 1428년까지 재위한 일본의 101대 천황이다. 고코마쓰 천황의 장남으로, 12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했지만 고코마쓰 상황이 섭정했다. 병약하여 후계자를 두지 못했고, 결국 고하나조노 천황이 그의 뒤를 이었다. 재위 기간 동안 오에이의 외침, 쇼군 아시카가 요시모치의 사망 등 여러 사건이 있었으며, 27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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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코 천황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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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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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쇼코 천황 |
일본어 | 칭광천황 (称光天皇) |
휘 | 미히토 (躬仁, 실인/實仁) |
추호 | 쇼코인 (칭광원/称光院), 쇼코 천황 (칭광천황/称光天皇) |
통치 | |
국가 | 일본 |
직위 | 천황 |
재위 기간 | 1412년 10월 5일 ~ 1428년 8월 30일 |
일본 재위 기간 (음력) | 오에이(応永) 19년 8월 29일 ~ 쇼초(正長) 원년 7월 20일 |
즉위례 | 1415년 1월 29일 (오에이 21년 12월 19일) |
대嘗祭 | 1415년 12월 21일 (오에이 22년 11월 21일) |
시대 | 무로마치 시대 |
연호 | 오에이, 쇼초 |
수도 | 교토 |
거처 | 교토 어소 |
선대 천황 | 고코마쓰 천황 |
계승 천황 | 고하나조노 천황 |
섭정 | 아시카가 요시모치, 아시카가 요시카즈 |
쇼군 | 아시카가 요시모치 → 요시카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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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 |
출생일 | 1401년 5월 12일 |
사망일 | 1428년 8월 30일 |
향년 | 28세 |
사망 장소 | 구로도 어소 (黒戸御所) |
릉묘 | 후카쿠사노키타노미사사기 (深草北陵), 교토 |
대喪儀 | 1428년 9월 8일 (쇼초 원년 7월 29일) |
원복 | 1411년 12월 13일 (오에이 18년 11월 28일) |
가족 관계 | |
아버지 | 고코마쓰 천황 |
어머니 | 히노니시 스케코 (후지와라 스케코) |
자녀 | 딸 2명 |
궁인 | 기이노쓰보네 (紀伊局) |
2. 생애
쇼코 천황(称光天皇|쇼코 텐노일본어, 1401년 5월 12일 ~ 1428년 8월 30일, 재위: 1412년 10월 5일 ~ 1428년 8월 30일)은 일본의 제101대 천황이다. 휘는 미히토(躬仁)였으나 후에 실인(實仁)으로 고쳤다. 시호인 쇼코(稱光)는 제48대 쇼토쿠 천황(稱德天皇)과 제49대 고닌 천황(光仁天皇)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 따온 것이다.
고코마쓰 천황의 장남으로 태어나 1412년 아버지의 양위를 받아 12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했다.[4] 하지만 실제 즉위식은 2년 뒤인 1415년 1월 29일에 거행됐다.[4][3] 쇼코 천황의 치세 동안 아버지 고코마쓰 천황이 상황으로서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며 원정을 펼쳤고,[3][5]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 아시카가 요시모치가 국정 운영을 총괄했다.[3][5] 쇼코 천황은 어머니 쪽 히노씨 가문을 통해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와도 먼 친척 관계였다.
쇼코 천황은 평생 병약하여 후계자를 두지 못했다. 이 때문에 아버지 고코마쓰 상황은 쇼코 천황의 사촌[18]이자 후시미노미야 사다후사 친왕의 아들인 히코히토 친왕(고하나조노 천황)을 후계자로 지명했다.
1428년 8월 30일(쇼초 1년 7월 20일), 쇼코 천황은 후사 없이 28세(만 27세[10])의 젊은 나이로 붕어했다.[10][18] ''일본 왕대일람''은 그의 죽음에 대해 "이 군주는 마법과 악마 숭배에 몰두하며 순수한 삶을 살았고, 엄격하게 금욕과 단식을 지켰다"고 기록하고 있다.[11] 그의 붕어 후 고코마쓰 상황의 유자(猶子)가 된 히코히토 친왕이 10세의 나이로 즉위하여 고하나조노 천황이 됐다.[18][12]
쇼코 천황의 치세 중 주요 사건은 다음과 같다.
- '''1413년''' (오에이 20년): 쇼군 아시카가 요시모치가 병에 걸려 이세 신궁에 사자를 보내 건강 회복을 기원했다.[6]
- '''1418년''' (오에이 25년): 아시카가 요시모치가 스루가국의 후지산 기슭에 있는 아사마 신사 재건을 명령했다.[7]
- '''1419년 7월 18일''' (오에이 26년 6월 26일): 오에이의 외침. 조선이 쓰시마섬을 공격했다.
- '''1423년''' (오에이 30년 2월): 쇼군 아시카가 요시모치가 아들 아시카가 요시카쓰에게 쇼군직을 물려주었다.[8]
- '''1425년 3월 17일''' (오에이 32년 2월 27일): 쇼군 아시카가 요시카쓰가 1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4]
- '''1428년 2월 3일''' (쇼초 1년 1월 18일): 아시카가 요시모치가 아들의 사망 후 쇼군직을 다시 맡았으나, 43세의 나이로 곧 사망했다.[9]
쇼코 천황은 교토시 후시미구의 후카쿠사키타노 능(深草北陵)에 안장됐다.
2. 1. 출생과 즉위
고코마쓰 천황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히노니시 모토코(日野西資子)로 히노 스케쿠니(日野資国)의 딸이다. 무로마치 막부의 3대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미쓰는 외가인 히노 가문을 통해 먼 친척 관계였는데, 요시미쓰의 정실 히노 야스코(日野康子)는 쇼코 천황의 외할아버지 스케쿠니의 여동생이었다.즉위 전의 이름(휘)은 미히토(躬仁)였으나, 나중에 실인(實仁)으로 고쳤다. 『간몬일기』에 따르면, 당시 쇼군이었던 아시카가 요시모치가 원래 이름인 궁인(躬仁)의 '궁(躬)' 자에 "몸에 활이 있는 것은 어려움이 있다"고 여겨 가쿠온 에코에게 상담했고, 그 결과 음이 같은 '실(實)' 자로 바꾸게 되었다고 한다. 쇼코(稱光)라는 시호는 제48대 쇼토쿠 천황(稱德天皇)과 제49대 고닌 천황(光仁天皇)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 따온 것이다.
1411년(오에이 18년) 11월 25일, 친왕 선하를 받았다. 3일 뒤인 11월 28일, 11세의 나이로 원복(성인식)을 치렀으며, 의식의 주관자(가칸)는 당시 내대신이자 제4대 쇼군이었던 아시카가 요시모치가 맡았다.
1412년 10월 5일(오에이 19년 음력 8월 29일), 아버지 고코마쓰 천황의 양위를 받아 12세의 나이로 천황이 되었다(선조, 踐祚).[4] 그러나 실제 즉위식(소쿠이, 即位)은 2년 뒤인 1415년 1월 29일(오에이 21년 음력 12월 19일)에 거행되었다.[4][3]
쇼코 천황이 다이리의 공식적인 수장이 되었을 때는 겨우 12세였기 때문에, 아버지 고코마쓰 천황이 상황으로서 조정의 실권을 계속 장악하고 정무를 보았다.[3][5] 동시에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 아시카가 요시모치가 국정 전반을 총괄하는 체제였다.[3][5]
2. 2. 후계 문제와 갈등
조정에서는 고코마츠 상황이 원정을 행하고 있었지만, 쇼코 천황은 선천적으로 병약했고[14] 후사를 얻지 못했다.오에이 29년(1422년) 3월 하순(또는 4월 중순) 이후, 쇼코 천황은 건강이 나빠져 6월에는 병세가 더욱 악화되어 의사도 손쓰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당시 쇼군이었던 아시카가 요시모치는 9월 11일, 고코마츠 상황을 대신하여 이세 신궁에 참배하며 천황의 회복을 빌었다.
같은 해 12월, 쇼코 천황의 병은 기적적으로 회복되었으나, 고코마츠 상황은 천황에게 후계자가 없는 것을 걱정하여, 8월에 요시모치와 선도 어소에서 상담한 끝에 천황의 동생인 오가와노미야를 황태제로 삼기로 결정했다 (『본조황윤소운록』『사계기』). 하지만 오가와노미야 역시 쇼코 천황처럼 기행이 잦았고, 오에이 30년(1423년) 2월에는 오가와노미야가 쇼코 천황이 아끼던 양을 강제로 빼앗아 죽이는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게다가 쇼코 천황이 아직 젊어 황자를 얻을 가능성이 있었기에, 이러한 황태제 지명은 오히려 상황과 천황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오에이 32년(1425년) 2월 16일, 오가와노미야가 요절하면서 후계자 자리는 다시 비게 되었다. 이에 더해 쇼코 천황은 상황에 대한 반발심으로 퇴위를 시도하는 모습을 보였다. 같은 해 6월 28일에는 천황이 내리(궁궐)를 탈출하려 하자[15], 상황의 요청을 받은 요시모치가 나서서 중재하고 천황을 달랬다. 당시 천황과 상황의 갈등을 조정할 수 있는 인물은 요시모치뿐이었다.
쇼코 천황은 젊었지만 병약하여 황자를 얻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이 때문에 상황과 요시모치는 지묘인통 고곤 천황 계열의 유일한 남자 후손(다른 남자아이들은 승적에 들어갔다)인 후시미노미야가의 후시미노미야 사다나리 친왕을 후계자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다나리 친왕은 그해 4월에 친왕 선하를 받았지만 당시 54세로 나이가 많다는 문제가 있었고, 그를 후계자로 삼으려 하자 상황과 천황 간의 갈등이 다시 불거졌다. 결국 3개월 뒤인 윤6월 3일, 사다나리 친왕은 출가할 수밖에 없었다[16].
같은 해 7월 25일, 쇼코 천황은 다시 중병에 걸려 요시모치와 나카야마 사다치카 등이 급히 문병을 올 정도였다고 한다. 7월 29일에는 천황 스스로도 죽음을 각오했는지, 생모인 시시(니이도노)에게 원호를 정하도록 명했으나, 요시모치로부터 이 소식을 들은 상황은 "경솔한 행동"이라며 반대했다. 이때는 요시모치의 설득으로 시시에게 준삼후 선하와 고한문원(光範門院)이라는 여원호가 정해졌다. 8월 1일에는 쇼코 천황이 위독해져 어머니의 간호와 요시모치의 문병을 받았다. 이 때문에 회복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한 요시모치는 장례 준비까지 시작했으나[17], 8월 2일에 천황의 상태가 호전되기 시작하여 8월 5일에는 완쾌했는데, 이때의 병은 감기(사기)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쇼코 천황은 내세울 만한 치적이 없었고, 무로마치 막부의 의향으로 대시개원도 쉽게 인정받지 못했다. 즉위 16년 만에 겨우 개원이 이루어졌으나, 그로부터 3개월 후에 붕어했다. 결국 고고곤 계통의 단절이 확실해지고 후계자가 정해지지 않으면서 정치적 불안정이 심화되었고, 이는 고난조 세력이 황위 탈환을 노리는 움직임을 보이는 배경이 되었다.
2. 3. 붕어
쇼코 천황은 병약하여 후계자를 두지 못했다. 이에 아버지인 고코마쓰 상황은 쇼코 천황의 후계자로 그의 사촌[18]이자 사다나리의 아들인 히코히토 친왕(고하나조노 천황)을 지명했다.쇼코 천황은 정장 원년(1428년) 7월 6일 위독해졌고, 같은 해 7월 20일(양력 8월 30일[10]) 28세(만 27세[10])의 나이로 붕어했다.[18] ''일본 왕대일람''에는 쇼코 천황의 죽음에 대해 "이 군주는 마법과 악마 숭배에 몰두했으며, 엄격한 금욕과 단식을 지켰다"고 기록되어 있다.[11]
쇼코 천황이 붕어하자, 고코마쓰 상황의 유자(猶子)가 된 히코히토 친왕이 10세의 나이로 즉위하여 고하나조노 천황이 되었다.[18][12]
능은 교토시 후시미구의 후카쿠사키타노 능(深草北陵, 후카쿠사노키타노미사사기)이다.
3. 연호
쇼코 천황의 치세 동안 사용된 연호는 다음과 같다.[3]
4. 가계도
고코마쓰 천황의 장남이다. 후사 없이 사망하여, 그의 먼 친척인 고하나조노 천황이 황위를 계승하였다.
"쇼코(称光)"라는 시호는 제48대 쇼토쿠 천황(称徳)과 제49대 고닌 천황(光仁)의 이름에서 각각 한 글자씩 따와서 만들어졌다.
::::::쇼토쿠 천황(称徳)
::::::::: ↓
::::::: 쇼코(称光)
::::::::::↑
::::::고닌 천황(光仁)
4. 1. 가족 관계
고코마쓰 천황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히노 스케쿠니(日野資国)의 딸인 히노니시 모토코(日野西資子)이다. 왕위에 오르기 전의 개인 이름은 미히토(躬仁, 후에 実仁로 개명)였다. 쇼코(称光)라는 시호는 48대 쇼토쿠 천황(称徳)과 49대 고닌 천황(光仁)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 따온 것이다. 무로마치 막부의 3대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미쓰는 외가인 히노 가문을 통해 먼 친척 관계에 해당하는데, 요시미쓰의 정실은 쇼코 천황의 외할아버지인 스케쿠니의 여동생이었다.쇼코 천황은 병약하여[14] 후사를 두지 못했다. 아래는 그의 배우자와 자녀 목록이다.
직위 | 이름 | 부친 | 자녀 | 비고 |
---|---|---|---|---|
전시 | 후지와라(히노) 미츠코 | 히노 아리미츠 | - | 권대납언 전시 | ||||
내시 | 미나모토(고츠지) 아사코 | 고츠지 아사나카 | 황녀 (1418년 출생) | 신내시, 천황이 인지하지 않음 | ||||
후지와라 씨 | 다카쿠라 나가후지 | - | | ||||
후지와라 씨 (이요노 쓰보네) | 지묘인 모토치카 | 황녀 (1426년 출생) | 오기마치 사네히데의 유자, 별칭 베쓰노 쓰보네 | ||||
카모 씨 (키이노 쓰보네) | 카모 스케아리 | - | |
아버지 고코마쓰 상황은 쇼코 천황의 후계자가 없는 것을 걱정하여, 쇼코 천황의 동생인 오가와노미야(小川宮)를 황태제로 삼으려 했으나, 오가와노미야는 1425년 요절하였다. 결국 고코마쓰 상황은 지묘인통 고곤 천황 계열의 후손이자 쇼코 천황의 팔촌에 해당하는 후시미노미야 사다후사 친왕의 아들 히코히토 왕(고하나조노 천황)을 후계자로 지목했다. 쇼코 천황이 1428년 28세의 나이로 후사 없이 사망하자, 10세의 고하나조노 천황이 황위를 계승하였다. 이로써 쇼코 천황을 마지막으로 고코마쓰 천황의 직계 남성 후계는 단절되었다.
4. 2. 계보
쇼코 천황은 고코마쓰 천황의 장남이다. 어머니는 히노니시 모토코(日野西資子)로, 구게인 히노 스케쿠니(日野資国)의 딸이다. 무로마치 막부의 3대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미쓰와는 외가인 히노 가문을 통해 먼 친척 관계에 해당하는데, 요시미쓰의 정실 부인이 쇼코 천황의 외할아버지인 스케쿠니의 여동생이었다.즉위 전 개인 이름(휘)은 미히토(躬仁)였으며, 나중에 실(実) 자를 써서 미히토(実仁)로 표기하기도 했다. '쇼코(称光)'라는 시호는 제48대 쇼토쿠 천황(称徳)과 제49대 고닌 천황(光仁)의 이름에서 각각 한 글자씩 따와서 만들어졌다.
쇼코 천황은 병약하여 후계자를 두지 못했다. 이에 아버지인 고코마쓰 상황은 쇼코 천황의 먼 친척에 해당하는 후시미노미야의 히코히토 왕(彦仁王, 훗날의 고하나조노 천황)을 양자로 삼아 후계자로 정했다. 히코히토 왕은 북조의 스고 천황의 증손자로, 쇼코 천황과는 촌수로는 8촌에 해당한다. 쇼코 천황이 28세의 나이로 요절하자 히코히토 왕이 10세의 나이로 즉위하여 고하나조노 천황이 되었다.
5. 인물 및 일화
쇼코 천황은 행실에 문제가 많아 아버지인 후코마츠 상황이나 아시카가 요시모치를 자주 곤란하게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특히 태도, 칼, 활과 같은 무기를 다루는 것을 좋아하여 그것을 가지고 노는 데 몰두했으며, 금으로 만든 채찍으로 주변의 측근이나 궁녀들을 때리기도 했다. 이러한 행동에 대해 아시카가 요시모치는 후코마츠 상황에게 직접 불만을 제기하기도 했다 (『칸몬일기』 오에이 23년 6월 19일 기록).
또한, 오에이 25년(1418년) 7월에는 쇼코 천황이 총애하던 한 내시가 임신하자, 그 아이가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 사다나리 친왕의 아이라고 주장하며 소란을 일으켰다. 이에 후코마츠 상황이 아시카가 요시모치에게 비밀리에 조사를 의뢰했고, 조사 결과 사실무근으로 밝혀지는 일도 있었다 (『칸몬일기』 오에이 25년 7월 14일~19일 기록).
쇼코 천황은 아들을 얻지 못하면서 고곤 천황의 혈통이 자신에게서 끊어질 수 있다는 사실에 큰 압박감을 느꼈던 것으로 보이며, 이러한 점이 아버지 후코마츠 상황과의 갈등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6. 사후
추증된 호칭인 "쇼코인(称光院)"은 고곤인(光厳院)의 선례에 따라 유학자의 건의로 정해졌으며, 고코마츠 상황(後小松上皇)이 여러 후보 안 중에서 선택했다고 한다.[19] 이 호칭은 덴무 계통의 제48대 쇼토쿠 천황(称徳天皇)과 덴지 계통의 제49대 고닌 천황(光仁天皇)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 따온 것이라는 설이 있다. 그러나 쇼토쿠 천황과 고닌 천황은 황통 변경을 연상시켜 부자연스럽다는 점에서, 북조의 시조이자 쇼코 천황의 고조부인 고곤 천황(光厳天皇)을 본뜬 것이라고 보는 연구자도 있다.[20]
능(미사사기)은 궁내청에 의해 교토부 교토시 후시미구 후카쿠사보초에 있는 후카쿠사키타 능(深草北陵, 후카쿠사노키타노미사사기)으로 지정되어 있다. 궁내청에서 관리하는 능의 형식은 방형당(方形堂)이다.
또한 황거의 궁중 삼전 중 하나인 황령전(皇霊殿)에는 다른 역대 천황 및 황족들과 함께 쇼코 천황의 영이 모셔져 있다.
참조
[1]
웹사이트
称光天皇 (101)
http://www.kunaicho.[...]
2013-08-28
[2]
서적
Annales des empereurs du japon
https://books.google[...]
1834
[3]
서적
[4]
서적
[5]
서적
[6]
서적
[7]
서적
Studies in Shinto and Shrines
1962
[8]
서적
[9]
서적
[10]
서적
[11]
서적
[12]
서적
[13]
서적
尊皇攘夷―水戸学の四百年
2021
[14]
문서
当時の公家の日記には「禁裏御不予」(天皇の病気)の記載が多く見られる。
[15]
문서
天皇が琵琶法師を内裏に招いて平家物語を聞こうとしたのであるが、上皇が天皇の行為を前例がないと反対した事から始まり、天皇も上皇が仙洞で先例が無いことをたびたび行ない、下劣な身分を昇殿させていると反論し、「院中において先例なき題目(事柄)はことごとく停止せらるべきなり」と使者の万里小路時房を怒鳴りつけ、さらに「帝位についているが、一事も院(上皇)の御心に叶わず、ことに禁中が窮迫して致し方ない上は、在位に全く執心しません。国の事はしかるべき様に御計らい下さい。我が身においては、天皇の位を辞し申します」と書面を上皇に送付した(『薩戒記』)。
[16]
문서
天皇が重篤から回復した後、天皇に貞成が呪詛した事が病気の原因であると讒訴した者があり、これが原因で天皇と貞成が対立したためともされる。なお、讒言した者は南朝・大覚寺統関係者でのちに処罰された(『看聞日記』)。
[17]
문서
御葬送路のため五条河原に浮き橋を渡すと云々、これ入道内相府(義持)の命と云々。
[18]
문서
後花園天皇
朝日日本歴史人物事典
[19]
서적
乱世の天皇
2020
[20]
서적
乱世の天皇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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